글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지금 이 글을 읽어보면 원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정말 알기 쉽게도 엉성하다. 아니 그전에 어중간하다. 원희의 마음은 어떤 결론이 나오기에는 너무 어중간한다.
그의 글에는 감상이나 사실을 나열 할 뿐이지 그 글에 진실이나 진심은 담겨 있지 않다.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
두 그럴 듯한 가짜뿐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진다는 것. 흔히 극단적이 되지 말자고 말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것과 방관은 다르다. 길을 걷는 것
과 길을 구경하는 것이 다르듯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어중간함.
이것은 방관이다. 관찰과는 다르다. 한 사회에서 관찰이란 분명 그 사회의 역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사회를 비추어 주는 역활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지켜봄으로 하나의 역활을 수행한다.
방관은 다르다. 그저 타협일 뿐이다. 모호한 이상과 막연한 현실의 타협일 뿐이다. 옳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쉽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비겁함이다.
지금 이 글에서도 어중간함이 나타난다.
방관을, 어중간함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책이나 그것에 대한 보안과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고착화이다. 어중간함을 상황을 고착시키고 더불어 악화시킨다.
차라리 우유부단한 것만 못한다. 우유부단은 선택의 사항을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한다. 그러나 어중간 함은 끝까지 어중간하다.
원희의 어중간함은 그의 주변인들에게 피해만을 주고 있다. 그의 불명확은 명백히 혼란을 주고 있다.
타인의 일이라는 인식과 자신의 지각 아래에 일어난 일인 이상 자신의 일이라는 인식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있는다.
타인에 대한 호의와 관계의 단절에서 어중간하게 있기에 혼란을 초래하기만 한다.
어중간하다.
정말 빌어 먹게도 어중간하다. 손을 내밀고 싶으면 내밀면 그만이고. 그의 일이기에 그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그만이다.
반쯤 내밀면서 손을 잡으면 도망가려하는 그 어중간함을 저주하고 싶다.
그런다 하더라도 변하는 일은 없겠지만.